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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모의 마음풍경 ⑨] 비정규직 여성으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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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4-18 12:23 조회3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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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부터 해체되기 시작한 나의 새 보금자리는 결혼 유지 기간 8년 만에 7살, 4살 두 딸과 함께 친정살이로 막을 내렸다. 가족해체라는 비극보다는 경력단절 여성으로 살기 위한 나의 노력은 2017년 현재까지도 나의 숙원사업이자 한국사회의 여성고용 실태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비정규직 여성으로 살아남기’라 할 수 있다.

 

​삼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나는 노동시장으로 진입조차 어려웠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들어간 직장이었지만 1993년에는 결혼과 함께 정리해고의 명단에 들어 있었다. 노동자로서의 기본 권리도 모른 채 고용계약서도 없던 그 시절 아는 분의 소개로 들어간 작은 미술관에서의 해고는 그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직업을 잃은 후 결혼생활에 매진해 보았지만 결국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가야 했고 몇 년 후엔 남편마저 사고로 떠났다. 아무런 보호 장치도, 남겨진 유산도 없이 나와 두 딸의 고군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1년 나는 직업을 가져야 했다. 가진 돈 200만원이 전부였던 그때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W사의 정수기 코디와 A사의 다단계 그리고 보험영업 뿐이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좀 더 젊은 나이에 체면 따위는 중요하게 생각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무 일이나 시작할 수 없었다. 아빠도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늘 옆에 있던 엄마는 밤늦게야 들어오는데 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해줄 수 없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또 임시직이라 해도 계속 할 수 있는 ‘좀 괜찮은 일’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이력서를 다시 사서 손으로 쓰고 막 시작된 인터넷 세상에 들어가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다.

절뚝거리는 임팔라를 굶주린 사자가 주시하듯 ‘Y선생’이라는 영어영업소에서 연락이 왔다. 그땐 대학을 나오면 전공하지 않아도 영어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영어를 잘 하는지 아니면 발음이 좋은지, 토플 성적은 있는지 물어 보지도 않고도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영어관리선생님’인 것이다. 관리를 잘 하려면 대학만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관리란 학생 관리는 물론 학부모 관리까지도 잘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영업의 달인이 되어야 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나는 열심히 가르쳤고 그러면 나와 아이들의 생계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꽤나 운이 좋았다. 하루에 여러 명을 같은 지역에서 가르쳐야 방과 후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5일 동안 휘경역 주변, 종암동 시장, 무악현대아파트와 주변 등 동선이 같은 집들을 모아 7집에서 8집 정도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니 아이들을 관리했다. 한 아이 당 소요 시간은 사무실에서 알려 준 대로 30분을 넘지 않아야 했다. 지금처럼 돌봄 교실이 없었던 초등학생 중 학원갈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 대부분은 Y선생을 했다. 초등영어에 큰 노하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꽤나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나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아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집에 없는 날은 다음 아이를 만날 시간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지금처럼 카페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핸드폰이 있었던 것도 차를 몰고 다닌 것도 아니었다. 밥 때를 거르기가 일쑤였고 하루 7~8집을 다니며 주는 차를 다 마시다 보면 방광염을 달고 살아야 했다. 화장실을 제때 갈 수 없어서다. 한 명의 아이가 한 권의 책과 서 너 개의 카세트 테이프를 소화하기 위해 우리는 한 달 4회 방문을 해서 열심히 관리해야 했다. 영어를 가르치기보다 말하자면 공부를 진행시키고 책을 배달하고 판매하고 수익의 35%를 가져가는 영어영업인 것이었다.

어떤 학생 엄마는 가르치는 동안 듣고 있기도 했고, 30분을 채우는지 아닌지 시간을 재기도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한 초등학생의 엄마는 아이를 이 따위로 대충 가르친다며 당장 끊겠다고 환불을 요청하기도 했다.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34세의 지금보다 젊은 그리고 언젠가는 내 남편이 돈을 벌어 나를 이 지옥에서 구해주겠지 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잠시만 견디면 되겠지...잠시만 견디면 되겠지... 그랬던 나에게 남편은 몇 백 만원 돈을 여러 번 요구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남편은 나를 구해주지도 않았고 혼자 영영 먼 곳으로 가버렸다.

10개월 뒤 나는 그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한 달도 쉬면 안 되는 한부모 여성가장인 내가 잠깐의 경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았다. 그후 12년 정도 영어를 가르치며 아이 둘을 키웠고 이 후 45세가 되었을 때 더 이상의 영어 관련 일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학원 원장들이 나보다 더 어렸기 때문이다. 어떤 4대 보험도 없었고 퇴직 연금도 없었다. 12년 동안 나의 일자리는 수도 없이 변했고 안정적이지도, 노후를 보장해 주지도 않았다. 2001년 그 해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W사의 정수기 코디와 A사의 다단계 그리고 보험영업 중 하나를 했더라면 나는 정규직 여성이 되었을까?

인생은 알 수 없는 점들의 연속이긴 하지만 지금 막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오롯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제대로 취업을 할 수 있는 직업 훈련을 알아보고 국가가 지원하는 서비스를 모조리 이용하고 좀 더 안정된 고용구조에 더 빨리 진입해야 한다고 말이다. 40대 후반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한부모의 삶은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한가정의 가장은 물론, 생각하기 싫어도 홀로 남은 생까지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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